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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과 개항 · 개항 이후 인천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인천은 부산, 원산의 뒤를 이어 1883년에 세 번째로 개항되었다. 개항 후 인천에는 많은 외국인이 들어와 생활하였고, 이들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접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화 과정을 체험하는 도시가 되었다.

제물포 개항은 인천지역사회에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외세의 진입과 이질적 문물의 유입에 따른 갈등에서도 그러하였지만, 그 보다는 일본이 원인천을 한국식민지 경영의 발판으로 삼은 데 있었다. 청·일전쟁(1894~1895)과 노·일전쟁(1904~1905)을 치르면서 한국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우선 제물포와 한성(漢城)을 잇는 도로와 철도를 부설하고(1899) 이들과 연계되는 항만의 확장·수축에 착수하였다(1906). 그리고 이어 일본의 식량(쌀)과 공업원료(주로 목면)를 확보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과 산미증식계획(1920년대), 수리조합 설립(부평수리조합: 1923) 등을 추진하였다.

인천지역사회는 이 과정에서 다른 지역에 앞서 많은 토지와 인력을 수탈당하고 대부분의 농민이 몰락하였다. 그리고 몰락한 농민은 저임금의 노동자와 가계보조적 노동인구(부녀자·아동들)를 증대시켜 조선인의 노동 여건을 더욱 악화시켰다. 인천지역사회에 통곡과 신음 소리가 가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일본인 거주지 중심으로 도시시설을 집중 투자하여 일본인에게만 유리한 일본인 중심의 도시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1914). 인천지역에서는 자연 제물포를 중심으로 한 원인천사회가 그 초점이 되었다. 앞서 경기도 인천군에서 인천부로(1910) 바뀌었던 원인천사회는 이 개편에서 도시지역과 농촌지역으로 양분되었다.

인천부는 일본인 시가지를 중심으로 부역(府域)이 크게 축소되고, 나머지 농·어촌지역은 부평을 중심으로 신설된 부천군(富川郡)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각국공동조계와 청국전관조계도 모두 철폐되고, 부의 하부 행정조직도 모두 일본식[정(町), 정목(丁目)]으로 바뀌었다. 인천부는 완전히 일본인 도시로 변하였고, 전통적인 생활권역과 공동체 질서는 파괴·약화되었다.


본 저작물은 '인천광역시청'에서 '2013년'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개항이후 인천(작성자:문화재과)'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인천광역시청, http://www.incheon.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