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록번호
- NBG1722
- 시대
- 1900년대
- 지역
- 중구
-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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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탕
1923년 7월 10일 「남만철도주식회사」가 작은 해수욕장과 조탕을 개장하였다. 조탕 이외의 위락 시설은 월미도 유원지 운영을 위해 설립된 「월미도유원주식회사」에서 설비하고 관리하였다.
조탕은 개장 첫날부터 500여 명이 찾아 성황을 이루었고, 해수욕장에는 여관, 임대 별장, 간이식당, 매점, 해수욕장, 보트 대여 등의 시설이 있어 동시기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휴양지인 원산의 송도원, 부산의 해운대를 제치고 월미도가 최고의 명소가 되는 발판이 되었다. 봄에는 월미도 중턱을지나는 순환도로에 만발한 벚꽃놀이로 사람들이 붐볐고, 여름에는 해수욕장 인파가 들끓었다. 특히 벚꽃이 피는 4월이면 행락객을 위한 화열차(花列車)가 운행되기도 하였다.
1924년 월미도유원주식회사가 조탕을 인수한 후 본격적으로 영리 목적의 시설물을 확충하면서, 월미도는 점차 대규모 유원지로 변모해 갔다. 1927년에는 조탕 내 60평 규모의 연무장을 신설했고, 해변에는 대형 해수욕장을 만들었따. 물놀이에 지친 아이들을 위해 놀이터에 미끄럼틀 · 철봉 · 그네 · 씨름장을 만들고, 원숭이 등 진기한 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게 하였다. 1935년 목조 건물 빈濱 호텔을 건립하였고, 1937년에는 만조시마다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설계한 용궁각이라는 일본식 요정도 세웠다. 일본 패망 때까지 월미도와 조탕은 근 20년간 호황을 누렸다. 1949년 「월미도관광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재개장한 월미도 조탕은 주말에 2천여 명이 모여들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지만, 이듬해 발발한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